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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인생은 퀴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빛의 제국>으로 잘 알려진 김영하 신작소설집. 2007년 서울, 스물일곱의 이민수를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은 이제 20대 후반이 된 80년생 젊은이들의 내밀한 욕망과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던 해에 태어나 컬러텔레비전을 보며 자라고, IMF 금융위기를 지켜보며 그 동안 향유했던 경제적인 풍요가 한순간에
몇가지, 재미나게 읽었던 부분을 발췌해서 올려본다.
이것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니 전편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소설속의 인물은, 살아 움직이는 주변인들과 같이, 개성이 있고, 자신들의 생각이 있고 의식이 있다.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이기는 하나, 작가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혹은 발췌한 내가 그들의 말에 100% 동조 하고 있다 는 식의 생각은 말아주기 바란다.
민수도, 빛나도, 곰보빵 할아버지도, 지원도 살아움직이는 인물로 상상하며 읽어야 이해가 된다.
...게다가 전에 없는 밝은 웃음과 따뜻한 태도로 나를 맞았다. 그럴수록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의 애교에는 자연스러움이 결여돼 있었는데, 그건 연기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애교를 떨기위해 노력한다는 것 까지 온전히 내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필사적이 되는 순간 애교는 더이상 애교가 아니라 공포가 된다.
"오빠, 우리 나가서 맛있는거 먹을까?"
"아니, 난 좀 피곤한데."
"알아, 오빠 힘든거. 그래도 나를 위해서 한 번만 나가주면 안돼?"
나는 빛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빛나는 결별선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얼굴로 태연하게 방글거리고 있었다.
"빛나야, 넌 좋은 애야. 그치만 이제 ... ... 그만하자. 난 말이야... ..."
"됐어. 그만 해. 나 좋은애 아니거든."
빛나는 이제 자신의 두번째 외교적 기예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토라진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짧은 소설을 알고 있다. 과테말라 작가 작품인데, 단 한줄이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공룡은 아직도 내 침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공룡대신 웬 할아버지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데서는 자주 보는 상황이지만 실제로 당해보면 대단히 황당하다.
"기회는 신선한 음식 같은거야. 냉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떨어져. 젊은이에게 제일 나쁜 건 아예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거야. 차라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게 더 나아.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봐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거, 이게 제일 나빠. ... "
"어쨌든, 뭐 버젓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곧 박사를 따서 교수가 된다거나 할 것 같지도 않은, 이런 고학력 백수를 도대체 왜 좋아하는 거야?"
...중략
"불쌍해서 그러는 것 같아."
"불쌍해? 누가? 내가?"
"내 친구. 정아 알지? 걔가 책을 하나 보고 있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 제목이 '왜 잘난 여성들은 한심한 남자한테 끌리는가?'야. 그 책에 보면 여성이 제일 경계해야 되는게 바로 동정심이래. 이 죽일 놈의 동정심! 바로 그것 때문에 똑똑하고 예쁜 여자들이 별볼일 없는 남자한테 엮여서 고생한다는 거지. 오빠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스타일이야. 뭐하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고, 늘 이거 하겠다 저거 하겠다 말만 하고. 툭하면 징징거리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엄마는 비둘기가 됐네 어쩌네 하구 말야. 너무 기분나빠 하지마. 오빠가 하도 궁금해하길래 얘기해주는 거니까."
나는 할말을 잊고 입을 딱 벌렸다.
...중략
"너무 이분 나쁘게 듣지마. 다 오빠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오빠는 정신좀 차려야 돼. 요즘 오빠 또래의 다른 남자들. 정말 열심히 산단 말이야. 새벽에 도서관 가서, 응, 밤까지 책 보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과외도 하고, 뭐 알바도 하고 그러고도 시간을 짜내서 스터디까지해. 요즘 먹고살기가 얼마나 힘들어? 그것만 힘들면 다행이게? 남자들, 웬만해선 결혼도 못하잖아? 왜 못할까? 뭐, 오빤 아마 생각해 본적도 없겠지."
"왜 못하는데?"
"오빠, 여자들이 핸드백 살 때 제일 먼저 고려하는게 뭔지 알아?"
"몰라."
내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나는 이미 정신적으로 녹다운 직전 이었다.
"들고 다닐 때 쪽팔리지 않아야 된다는 거야. 그게 첫번째야. 기능? 품질? 디자인? 그런건 다음 문제야. 그렇다고 꼭 브랜드를 들어야 한다는건 아니야. 어쨌단 쓸만한 백이 없으면 차라리 배낭을 메고 다니는게 낫다는 거지. 남편 고르는 것도 똑같아. 백 사는거랑 비슷한데, 이건 한번 잘못 고르면 갖다 버릴수도 없고, 반품도 잘 안되고. 그래서 여자들이 숙고에 숙고를 하는거야. 요즘 여자애들이 눈은 얼마나 높아. 브래드 피트, 오다기리 조, 강동원, 웬트워스 밀러 같은 꽃미남들이 수두룩 하잖아. 이제 남자들도 글로벌 경쟁시대야. 어학연수 갔다가 외국 남자들하고 눈 맞은 애들이 어디 한둘이야? 솔직히 말해서 한국 남자들은 국제 경쟁력이 너무 떨어져. 요리를 잘하길 하나 매너가 좋기를 하나. 분위기고 딱딱 못맞추면서 자존심은 세고. 심지어 자기들이 무지하게 잘난 줄 알잖아. 못말리는 나르시시스트들. 이게 다 한국 엄마들이 오냐오냐 키워서 그래."
...중략
"나는 말이야. 아무래도 너랑 가는 길이 다른 것 같아."
"달라? 뭐가 달라?"
"나는 말이야. 아직 철이 덜 들었나봐. 나는 좀. 그러니까 뭐라고 할해야 되나. 그냥 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싶어."
"무의미한 일?"
"사람들은 대부분 의미 있는 일들을 하잖아. 돈을 벌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근데? 그게 당연한거 아니야?"
"뭐랄까. 인생에는 그런 것 보다 더 높은 차원의 뭔가가 있는 것 같아.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런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거지. 신문의 경제면에 나는 세계. 그러니까 주식형 펀드니, 환율이니, 청약부금이니. 분양제도 개편이니 하는 세계 너머에 또 다른 뭔가가 있을 거라는 거지. 인간이 그런 일간지 경제면 같은 세계에만 매몰돼서 산다는건,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는 건, 너무 허망한거 같아."
중략...
"오빠가 아직 배가 부르구나. 매몰되긴 뭐가 매몰돼? 그게 전부야. 그 너머엔 아무것도 없어. 꿈 깨."
빛나가 차갑게 말했다.
"뭐?"
"아직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오빠가 몰라서 그래. 왜 그렇게 허황해? 하여간 남자들이란......"
빛나가 혀를 찼다. 나는 곰보빵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무서운 세상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배가 덜 고픈걸까?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오뎅바에서마저 현실주의자 김빛나에게 패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항변했다.
중략...
"내가 오빠를 잘못 생각했었나봐. 오빠는 아무래도 안되겠어. 뭐랄까, 뼛속 깊이 게으름이 배어 있다고나 할까. 오빠는 이러니저러니 멋진 말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실은 그냥 놀고 싶은거야.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서 유유자적하며 살려는 거지. 안그래?"
빛나는 토트백을 집어들었다.